김래빈은 인생 최대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Red.”

물론 매번 새 앨범 작업에 돌입할 때면 일생일대의 난제에 맞닥트린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작업실에 틀어박혀 골몰하는 바람에 형들―혹은 형들의 사주를 받은 동갑내기―에게 끌려 나오기 일쑤였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Red∼, Red∼, R, E, D∼!”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캔을 들어 그새 약간 미지근해진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탄산이 톡 하고 터질 때마다 뭔가가 떠오를락 말락, 생각의 타래에서 비죽 튀어나온 실 끄트머리가 달랑거렸다. 차분히 생각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한국어로는 빨강∼!”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주기만 한다면 바로….

“나는 빨간색이 좋아∼!”

“차유진 조용히 좀 해!”

김래빈이 버럭 소리치자, 옆에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던 차유진이 입을 헤벌린 채 멈췄다. 남아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단숨에 들이켠 김래빈이 친구의 바보 같은 표정을 향해 눈을 흘겼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거야.”

“My favorite color R.E.D∼, 내가 만들었어!”

“그런 것 같았어.”

제목까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김래빈의 대답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차유진이 김래빈 앞에 있는 캔을 낚아챘다. 캔을 흔들어 내용물이 빈 걸 확인하곤 그대로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아귀에서 캔이 와작 구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김래빈은 습관적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영감의 끄트머리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김래빈은 테이블 옆에 세워둔 화이트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Concert Concept]

차유진이 쓴 글씨가 화이트보드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쓰는 동글동글한 한글 글씨체와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글씨였다. 그리고 그 위로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또박또박 쓴 글씨도 있었다.

[EG&RB 유닛 콘서트]

이게 현재 김래빈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김래빈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서트의 또 다른 주인공은 태평하게 캔을 최대한 납작하게 찌그러트린 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김래빈이 비어 있는 회의실 의자들을 보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회사 직원들을 차지하더라도 당분간은 채워지지 못할 빈자리들이 허전했다.

문화 훈장을 받아 군대를 최대한 미뤘지만, 결국 테스타도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왔다. 맏형인 배세진을 필두로 완전체로 모이는 텀을 줄이고자 잇따라 다른 형들도 입대하고 나니 남은 건 군 면제인 류청우와 미국인, 그리고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김래빈이었다.

처음 소속사는 남아 있는 셋을 묶어 유닛 활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류청우가 다른 의사를 밝혔다. 멤버들이 없는 동안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연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배세진과 배우 활동 관련 이야기를 종종 나누며 대본 리딩을 도와주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배우 일에 관심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리더로서 늘 팀의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열의를 다했던 류청우였기에, 팀 활동을 멈춘 지금이 다른 것을 도전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레 유닛은 막내들의 2인 활동으로 확정됐다. 메인보컬의 부재로 선택지는 좁아졌지만, 차유진과 김래빈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선보였다. 강렬한 비트를 곁들인 랩과 체력을 아끼지 않는 과격한 퍼포먼스, 거기에 퇴폐적인 섹시함까지 곁들이자,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제일 어린 막내들이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섹스어필해도 돼냐? 당연히 되지. 완전 되지ㅠㅠㅠㅠㅠㅠㅠ하고싶은거 다해 애들아!!!

―형들 없을 때 이런 걸?? 유진촤 대체 얼마나 벌고 싶은 거냐? (적금깸)

―아기 토끼 아니지요 제 남자 맞습니다ㅜㅜ

―여태 유교 형아들이 막내들 단도리 존나했던 걸로 밝혀져ㅋㅋㅋㅋ

―(gif 첨부) 여기서 김래빈이랑 차유진 서로 목 잡았다가 훑으면서 놓는 거 진심 너무 야해서 엄마 몰래 봤다.

막내들의 유닛 활동은 SNS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가상 현실을 기반으로 한 컨셉추얼한 남자 아이돌 노래치곤 꽤 괜찮을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잇기 위해 곧바로 소속사에서 추진한 것이 바로 유닛 콘서트였다.

“김래빈 무슨 생각 해?”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차유진은 하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읊었고 점심시간인 지금도 멈추질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도 탈이다.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만 추렸는데도 스무 개가 훌쩍 넘었다.

“그냥, 어떤 컨셉으로 하는 게 좋을까 고민….”

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어떤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형들 없이 하는 첫 콘서트였다. 형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팬들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김래빈도 차유진 못지않았기에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김래빈 이거 봐!”

도로 생각에 잠기려는 김래빈 앞으로 차유진이 종이 한 장을 쑥 내밀었다. 언제 적었는지 끔찍했던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설마 콘서트에서 이것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가사를 훑어보자, 차유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Red로 하자! 빨간 조명 많이 사용하는 거야. 분명 우리를 뜨겁고 열정적으로 보이게 해줄 거야.”

글쎄. 위험하거나 공포스러울 것 같은데…. 말을 삼킨 김래빈이 머릿속으로 빨간색 조명이 가득한 무대 위를 그려보았다.

“콘서트의 전체적인 색감을 레드로 하고 싶다는 거지?”

“응!!”

차유진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붕붕 흔들렸다. 김래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빨간색이 좋으면 머리도 빨갛게 하지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내일 당장 할래.”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머리 감을 때마다 빨간 물을 줄줄 흘리는 차유진을 보게 생긴 것이다. 차유진이 맨 처음 머리를 빨갛게 염색했던 날이 떠올랐다.

‘김래빈 나 머리에서 피나!!’

아주사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 차유진은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진하게 남기고 싶단 포부를 다지며 머리를 빨갛게 물들였었다. 그리고 담날 머리를 감다가 기겁해 뻘건 물을 뚝뚝 흘리며 뛰쳐나왔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사 때는 아직 데뷔 전인 데다가 아이돌 서바이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이름을 기억하지, 우연히 채널 돌리다가 보는 일반인들에겐 빨간 머리 걔로 통했던 차유진이었다. 그리고 빨간 머리 걔 옆에 있는 검은 머리가 바로 김래빈이었다.

아주사라….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었다. 김래빈은 약간 길게 내려온 제 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검은색으로 염색할까?”

“Oh,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우리 아주사 처음 나왔을 때 같겠다. 맞지? Red & Black.”

해맑게 웃는 차유진을 보며 김래빈은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말곤 취향, 스타일, 가치관 무엇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친구는 가끔 이렇게 서로의 머릿속을 읽는 것처럼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김래빈은 펜을 들고 차유진이 온통 Red라고 써 놓은 종이 옆에 검정이라고 썼다. 미국인인 차유진을 상징하는 색이 레드라면 한국인인 김래빈을 상징하는 색은 블랙이 아니라 검정일 것이다. 또박또박 쓴 검정이란 단어를 물끄러미 보던 김래빈은 그 옆에 한자를 하나 더 추가했다. 차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한자야?”

“검을 현(玄).”

검은색을 나타내는 한자 하면 보편적으로 검을 흑(黑)을 떠올리겠지만, 어린 시절 조부모님 앞에서 천자문 동요를 들으며 재롱을 부리던 김래빈에겐 검을 현이 좀 더 입에 붙었다.

김래빈이 친절하게 한자 밑에다가 한글로 검을 현이라고 써주자, 차유진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검색 창에 검을 현이라고 입력하자 여러 가지 뜻이 주르륵 나왔다.

“검다. 검붉다. 오묘? 하다. 심오? 신묘? 나 고요하다는 무슨 말인 줄 알아. 아득하다, 멀다, 아찔하다, 짙다, 빛나다, 하늘. 뜻 너무 많아.”

어떻게 글자 하나에 뜻이 이렇게 많냐며 신기해하는 차유진의 모습에 김래빈도 말은 하진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저도 검을 현에 이렇게 많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색을 의미하는 뜻으로 쓴 거야.”

차유진이 한 번 더 첫 번째에 있는 뜻을 소리 내어 읽었다.

“검다. 검붉다.”

“네가 콘서트 색감을 빨간색으로 잡고 싶어 하니까, 나는 검은색으로 잡고 대비를 이루면 어떨까 싶어서.”

“나는 빨간색. 김래빈은 검은색.”

“그래.”

김래빈의 설명을 들은 차유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바싹 자른 손톱 끝이 ‘검다’ 옆에 있는 ‘검붉다’란 글씨를 가리켰다.

“검붉다. 이거 검고 붉다는 뜻이야.”

“맞아.”

김래빈이 긍정하자 차유진이 히죽 웃으며 집게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제스처에 어리둥절해진 김래빈이 요구대로 순순히 상체를 차유진 쪽으로 기울이자, 차유진은 둘 말곤 아무도 없는 회의실인데도 비밀을 속삭이듯 귓가에 손을 모은 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김래빈이 내 색으로 물드는 거네.”

“…!”

화들짝 놀라 귀를 감싼 김래빈이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아서였을까. 등줄기를 타고 열이 쭉 오르고 솜털은 쭈뼛 섰다. 남다른 반사신경을 발휘해 김래빈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붙잡은 차유진이 김래빈을 올려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차유진의 뺨이 크게 부풀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김래빈 지금 표정 왜 그래?”

“니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런 거잖아!”

“진짜 웃겨.”

험악하게 금이 간 김래빈의 미간을 보며 차유진은 계속 킬킬댔다.

“그만 웃어. 그리고 내가 말한 뜻은 검다는 의미였어.”

“검붉다는 뜻도 된다고 적혀 있어.”

“아니야. 검다는 의미만 허용할 거야.”

“검붉다란 뜻도 돼.”

“검다라니까.”

“검붉다!”

“검다!”

검을 현이 검은색인지 검붉은색인지에 대한 논쟁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시간에 맞춰 가장 먼저 회의실로 복귀한 직원이 옥신각신하는 막내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투덕거릴 일인가 싶었다. 검을 현의 뜻이 검으면 어떻고 검붉으면 어떠냔 말이다. 붉은색이 검은색을 물들였는지―김래빈은 ‘침범’이라고 표현했다―알 수 없었지만, 피어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김래빈의 귓불은 확실히 붉게 물든 상태였다.

막내들의 말싸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직원이 테이블에 있는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신곡 아이디어인가, 싶어 집중해서 읽어보다가 잘게 떨기 시작한 직원의 동공이 영어와 한자가 조합된 글씨에서 멈췄다.

“레드, 현? 레드현. 오―, 이거 어감이 좋은데요? 신곡 제목이에요?”

“……!!”

막내들의 유닛 콘서트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Written by @Kim_JaHA

김래빈은 인생 최대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Red.”

물론 매번 새 앨범 작업에 돌입할 때면 일생일대의 난제에 맞닥트린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작업실에 틀어박혀 골몰하는 바람에 형들―혹은 형들의 사주를 받은 동갑내기―에게 끌려 나오기 일쑤였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Red∼, Red∼, R, E, D∼!”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캔을 들어 그새 약간 미지근해진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탄산이 톡 하고 터질 때마다 뭔가가 떠오를락 말락, 생각의 타래에서 비죽 튀어나온 실 끄트머리가 달랑거렸다. 차분히 생각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한국어로는 빨강∼!”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주기만 한다면 바로….

“나는 빨간색이 좋아∼!”

“차유진 조용히 좀 해!”

김래빈이 버럭 소리치자, 옆에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던 차유진이 입을 헤벌린 채 멈췄다. 남아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단숨에 들이켠 김래빈이 친구의 바보 같은 표정을 향해 눈을 흘겼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거야.”

“My favorite color R.E.D∼, 내가 만들었어!”

“그런 것 같았어.”

제목까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김래빈의 대답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차유진이 김래빈 앞에 있는 캔을 낚아챘다. 캔을 흔들어 내용물이 빈 걸 확인하곤 그대로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아귀에서 캔이 와작 구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김래빈은 습관적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영감의 끄트머리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김래빈은 테이블 옆에 세워둔 화이트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Concert Concept]

차유진이 쓴 글씨가 화이트보드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쓰는 동글동글한 한글 글씨체와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글씨였다. 그리고 그 위로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또박또박 쓴 글씨도 있었다.

[EG&RB 유닛 콘서트]

이게 현재 김래빈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김래빈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서트의 또 다른 주인공은 태평하게 캔을 최대한 납작하게 찌그러트린 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김래빈이 비어 있는 회의실 의자들을 보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회사 직원들을 차지하더라도 당분간은 채워지지 못할 빈자리들이 허전했다.

문화 훈장을 받아 군대를 최대한 미뤘지만, 결국 테스타도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왔다. 맏형인 배세진을 필두로 완전체로 모이는 텀을 줄이고자 잇따라 다른 형들도 입대하고 나니 남은 건 군 면제인 류청우와 미국인, 그리고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김래빈이었다.

처음 소속사는 남아 있는 셋을 묶어 유닛 활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류청우가 다른 의사를 밝혔다. 멤버들이 없는 동안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연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배세진과 배우 활동 관련 이야기를 종종 나누며 대본 리딩을 도와주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배우 일에 관심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리더로서 늘 팀의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열의를 다했던 류청우였기에, 팀 활동을 멈춘 지금이 다른 것을 도전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레 유닛은 막내들의 2인 활동으로 확정됐다. 메인보컬의 부재로 선택지는 좁아졌지만, 차유진과 김래빈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선보였다. 강렬한 비트를 곁들인 랩과 체력을 아끼지 않는 과격한 퍼포먼스, 거기에 퇴폐적인 섹시함까지 곁들이자,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제일 어린 막내들이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섹스어필해도 돼냐? 당연히 되지. 완전 되지ㅠㅠㅠㅠㅠㅠㅠ하고싶은거 다해 애들아!!!

―형들 없을 때 이런 걸?? 유진촤 대체 얼마나 벌고 싶은 거냐? (적금깸)

―아기 토끼 아니지요 제 남자 맞습니다ㅜㅜ

―여태 유교 형아들이 막내들 단도리 존나했던 걸로 밝혀져ㅋㅋㅋㅋ

―(gif 첨부) 여기서 김래빈이랑 차유진 서로 목 잡았다가 훑으면서 놓는 거 진심 너무 야해서 엄마 몰래 봤다.

막내들의 유닛 활동은 SNS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가상 현실을 기반으로 한 컨셉추얼한 남자 아이돌 노래치곤 꽤 괜찮을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잇기 위해 곧바로 소속사에서 추진한 것이 바로 유닛 콘서트였다.

“김래빈 무슨 생각 해?”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차유진은 하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읊었고 점심시간인 지금도 멈추질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도 탈이다.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만 추렸는데도 스무 개가 훌쩍 넘었다.

“그냥, 어떤 컨셉으로 하는 게 좋을까 고민….”

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어떤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형들 없이 하는 첫 콘서트였다. 형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팬들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김래빈도 차유진 못지않았기에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김래빈 이거 봐!”

도로 생각에 잠기려는 김래빈 앞으로 차유진이 종이 한 장을 쑥 내밀었다. 언제 적었는지 끔찍했던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설마 콘서트에서 이것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가사를 훑어보자, 차유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Red로 하자! 빨간 조명 많이 사용하는 거야. 분명 우리를 뜨겁고 열정적으로 보이게 해줄 거야.”

글쎄. 위험하거나 공포스러울 것 같은데…. 말을 삼킨 김래빈이 머릿속으로 빨간색 조명이 가득한 무대 위를 그려보았다.

“콘서트의 전체적인 색감을 레드로 하고 싶다는 거지?”

“응!!”

차유진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붕붕 흔들렸다. 김래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빨간색이 좋으면 머리도 빨갛게 하지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내일 당장 할래.”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머리 감을 때마다 빨간 물을 줄줄 흘리는 차유진을 보게 생긴 것이다. 차유진이 맨 처음 머리를 빨갛게 염색했던 날이 떠올랐다.

‘김래빈 나 머리에서 피나!!’

아주사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 차유진은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진하게 남기고 싶단 포부를 다지며 머리를 빨갛게 물들였었다. 그리고 담날 머리를 감다가 기겁해 뻘건 물을 뚝뚝 흘리며 뛰쳐나왔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사 때는 아직 데뷔 전인 데다가 아이돌 서바이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이름을 기억하지, 우연히 채널 돌리다가 보는 일반인들에겐 빨간 머리 걔로 통했던 차유진이었다. 그리고 빨간 머리 걔 옆에 있는 검은 머리가 바로 김래빈이었다.

아주사라….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었다. 김래빈은 약간 길게 내려온 제 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검은색으로 염색할까?”

“Oh,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우리 아주사 처음 나왔을 때 같겠다. 맞지? Red & Black.”

해맑게 웃는 차유진을 보며 김래빈은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말곤 취향, 스타일, 가치관 무엇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친구는 가끔 이렇게 서로의 머릿속을 읽는 것처럼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김래빈은 펜을 들고 차유진이 온통 Red라고 써 놓은 종이 옆에 검정이라고 썼다. 미국인인 차유진을 상징하는 색이 레드라면 한국인인 김래빈을 상징하는 색은 블랙이 아니라 검정일 것이다. 또박또박 쓴 검정이란 단어를 물끄러미 보던 김래빈은 그 옆에 한자를 하나 더 추가했다. 차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한자야?”

“검을 현(玄).”

검은색을 나타내는 한자 하면 보편적으로 검을 흑(黑)을 떠올리겠지만, 어린 시절 조부모님 앞에서 천자문 동요를 들으며 재롱을 부리던 김래빈에겐 검을 현이 좀 더 입에 붙었다.

김래빈이 친절하게 한자 밑에다가 한글로 검을 현이라고 써주자, 차유진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검색 창에 검을 현이라고 입력하자 여러 가지 뜻이 주르륵 나왔다.

“검다. 검붉다. 오묘? 하다. 심오? 신묘? 나 고요하다는 무슨 말인 줄 알아. 아득하다, 멀다, 아찔하다, 짙다, 빛나다, 하늘. 뜻 너무 많아.”

어떻게 글자 하나에 뜻이 이렇게 많냐며 신기해하는 차유진의 모습에 김래빈도 말은 하진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저도 검을 현에 이렇게 많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색을 의미하는 뜻으로 쓴 거야.”

차유진이 한 번 더 첫 번째에 있는 뜻을 소리 내어 읽었다.

“검다. 검붉다.”

“네가 콘서트 색감을 빨간색으로 잡고 싶어 하니까, 나는 검은색으로 잡고 대비를 이루면 어떨까 싶어서.”

“나는 빨간색. 김래빈은 검은색.”

“그래.”

김래빈의 설명을 들은 차유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바싹 자른 손톱 끝이 ‘검다’ 옆에 있는 ‘검붉다’란 글씨를 가리켰다.

“검붉다. 이거 검고 붉다는 뜻이야.”

“맞아.”

김래빈이 긍정하자 차유진이 히죽 웃으며 집게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제스처에 어리둥절해진 김래빈이 요구대로 순순히 상체를 차유진 쪽으로 기울이자, 차유진은 둘 말곤 아무도 없는 회의실인데도 비밀을 속삭이듯 귓가에 손을 모은 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김래빈이 내 색으로 물드는 거네.”

“…!”

화들짝 놀라 귀를 감싼 김래빈이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아서였을까. 등줄기를 타고 열이 쭉 오르고 솜털은 쭈뼛 섰다. 남다른 반사신경을 발휘해 김래빈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붙잡은 차유진이 김래빈을 올려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차유진의 뺨이 크게 부풀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김래빈 지금 표정 왜 그래?”

“니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런 거잖아!”

“진짜 웃겨.”

험악하게 금이 간 김래빈의 미간을 보며 차유진은 계속 킬킬댔다.

“그만 웃어. 그리고 내가 말한 뜻은 검다는 의미였어.”

“검붉다는 뜻도 된다고 적혀 있어.”

“아니야. 검다는 의미만 허용할 거야.”

“검붉다란 뜻도 돼.”

“검다라니까.”

“검붉다!”

“검다!”

검을 현이 검은색인지 검붉은색인지에 대한 논쟁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시간에 맞춰 가장 먼저 회의실로 복귀한 직원이 옥신각신하는 막내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투덕거릴 일인가 싶었다. 검을 현의 뜻이 검으면 어떻고 검붉으면 어떠냔 말이다. 붉은색이 검은색을 물들였는지―김래빈은 ‘침범’이라고 표현했다―알 수 없었지만, 피어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김래빈의 귓불은 확실히 붉게 물든 상태였다.

막내들의 말싸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직원이 테이블에 있는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신곡 아이디어인가, 싶어 집중해서 읽어보다가 잘게 떨기 시작한 직원의 동공이 영어와 한자가 조합된 글씨에서 멈췄다.

“레드, 현? 레드현. 오―, 이거 어감이 좋은데요? 신곡 제목이에요?”

“……!!”

막내들의 유닛 콘서트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Written by @Kim_JaHA

김래빈은 인생 최대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Red.”

물론 매번 새 앨범 작업에 돌입할 때면 일생일대의 난제에 맞닥트린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작업실에 틀어박혀 골몰하는 바람에 형들―혹은 형들의 사주를 받은 동갑내기―에게 끌려 나오기 일쑤였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Red∼, Red∼, R, E, D∼!”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캔을 들어 그새 약간 미지근해진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탄산이 톡 하고 터질 때마다 뭔가가 떠오를락 말락, 생각의 타래에서 비죽 튀어나온 실 끄트머리가 달랑거렸다. 차분히 생각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한국어로는 빨강∼!”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주기만 한다면 바로….

“나는 빨간색이 좋아∼!”

“차유진 조용히 좀 해!”

김래빈이 버럭 소리치자, 옆에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던 차유진이 입을 헤벌린 채 멈췄다. 남아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단숨에 들이켠 김래빈이 친구의 바보 같은 표정을 향해 눈을 흘겼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거야.”

“My favorite color R.E.D∼, 내가 만들었어!”

“그런 것 같았어.”

제목까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김래빈의 대답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차유진이 김래빈 앞에 있는 캔을 낚아챘다. 캔을 흔들어 내용물이 빈 걸 확인하곤 그대로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아귀에서 캔이 와작 구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김래빈은 습관적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영감의 끄트머리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김래빈은 테이블 옆에 세워둔 화이트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Concert Concept]

차유진이 쓴 글씨가 화이트보드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쓰는 동글동글한 한글 글씨체와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글씨였다. 그리고 그 위로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또박또박 쓴 글씨도 있었다.

[EG&RB 유닛 콘서트]

이게 현재 김래빈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김래빈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서트의 또 다른 주인공은 태평하게 캔을 최대한 납작하게 찌그러트린 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김래빈이 비어 있는 회의실 의자들을 보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회사 직원들을 차지하더라도 당분간은 채워지지 못할 빈자리들이 허전했다.

문화 훈장을 받아 군대를 최대한 미뤘지만, 결국 테스타도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왔다. 맏형인 배세진을 필두로 완전체로 모이는 텀을 줄이고자 잇따라 다른 형들도 입대하고 나니 남은 건 군 면제인 류청우와 미국인, 그리고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김래빈이었다.

처음 소속사는 남아 있는 셋을 묶어 유닛 활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류청우가 다른 의사를 밝혔다. 멤버들이 없는 동안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연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배세진과 배우 활동 관련 이야기를 종종 나누며 대본 리딩을 도와주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배우 일에 관심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리더로서 늘 팀의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열의를 다했던 류청우였기에, 팀 활동을 멈춘 지금이 다른 것을 도전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레 유닛은 막내들의 2인 활동으로 확정됐다. 메인보컬의 부재로 선택지는 좁아졌지만, 차유진과 김래빈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선보였다. 강렬한 비트를 곁들인 랩과 체력을 아끼지 않는 과격한 퍼포먼스, 거기에 퇴폐적인 섹시함까지 곁들이자,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제일 어린 막내들이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섹스어필해도 돼냐? 당연히 되지. 완전 되지ㅠㅠㅠㅠㅠㅠㅠ하고싶은거 다해 애들아!!!

―형들 없을 때 이런 걸?? 유진촤 대체 얼마나 벌고 싶은 거냐? (적금깸)

―아기 토끼 아니지요 제 남자 맞습니다ㅜㅜ

―여태 유교 형아들이 막내들 단도리 존나했던 걸로 밝혀져ㅋㅋㅋㅋ

―(gif 첨부) 여기서 김래빈이랑 차유진 서로 목 잡았다가 훑으면서 놓는 거 진심 너무 야해서 엄마 몰래 봤다.

막내들의 유닛 활동은 SNS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가상 현실을 기반으로 한 컨셉추얼한 남자 아이돌 노래치곤 꽤 괜찮을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잇기 위해 곧바로 소속사에서 추진한 것이 바로 유닛 콘서트였다.

“김래빈 무슨 생각 해?”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차유진은 하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읊었고 점심시간인 지금도 멈추질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도 탈이다.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만 추렸는데도 스무 개가 훌쩍 넘었다.

“그냥, 어떤 컨셉으로 하는 게 좋을까 고민….”

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어떤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형들 없이 하는 첫 콘서트였다. 형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팬들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김래빈도 차유진 못지않았기에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김래빈 이거 봐!”

도로 생각에 잠기려는 김래빈 앞으로 차유진이 종이 한 장을 쑥 내밀었다. 언제 적었는지 끔찍했던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설마 콘서트에서 이것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가사를 훑어보자, 차유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Red로 하자! 빨간 조명 많이 사용하는 거야. 분명 우리를 뜨겁고 열정적으로 보이게 해줄 거야.”

글쎄. 위험하거나 공포스러울 것 같은데…. 말을 삼킨 김래빈이 머릿속으로 빨간색 조명이 가득한 무대 위를 그려보았다.

“콘서트의 전체적인 색감을 레드로 하고 싶다는 거지?”

“응!!”

차유진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붕붕 흔들렸다. 김래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빨간색이 좋으면 머리도 빨갛게 하지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내일 당장 할래.”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머리 감을 때마다 빨간 물을 줄줄 흘리는 차유진을 보게 생긴 것이다. 차유진이 맨 처음 머리를 빨갛게 염색했던 날이 떠올랐다.

‘김래빈 나 머리에서 피나!!’

아주사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 차유진은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진하게 남기고 싶단 포부를 다지며 머리를 빨갛게 물들였었다. 그리고 담날 머리를 감다가 기겁해 뻘건 물을 뚝뚝 흘리며 뛰쳐나왔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사 때는 아직 데뷔 전인 데다가 아이돌 서바이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이름을 기억하지, 우연히 채널 돌리다가 보는 일반인들에겐 빨간 머리 걔로 통했던 차유진이었다. 그리고 빨간 머리 걔 옆에 있는 검은 머리가 바로 김래빈이었다.

아주사라….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었다. 김래빈은 약간 길게 내려온 제 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검은색으로 염색할까?”

“Oh,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우리 아주사 처음 나왔을 때 같겠다. 맞지? Red & Black.”

해맑게 웃는 차유진을 보며 김래빈은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말곤 취향, 스타일, 가치관 무엇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친구는 가끔 이렇게 서로의 머릿속을 읽는 것처럼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김래빈은 펜을 들고 차유진이 온통 Red라고 써 놓은 종이 옆에 검정이라고 썼다. 미국인인 차유진을 상징하는 색이 레드라면 한국인인 김래빈을 상징하는 색은 블랙이 아니라 검정일 것이다. 또박또박 쓴 검정이란 단어를 물끄러미 보던 김래빈은 그 옆에 한자를 하나 더 추가했다. 차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한자야?”

“검을 현(玄).”

검은색을 나타내는 한자 하면 보편적으로 검을 흑(黑)을 떠올리겠지만, 어린 시절 조부모님 앞에서 천자문 동요를 들으며 재롱을 부리던 김래빈에겐 검을 현이 좀 더 입에 붙었다.

김래빈이 친절하게 한자 밑에다가 한글로 검을 현이라고 써주자, 차유진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검색 창에 검을 현이라고 입력하자 여러 가지 뜻이 주르륵 나왔다.

“검다. 검붉다. 오묘? 하다. 심오? 신묘? 나 고요하다는 무슨 말인 줄 알아. 아득하다, 멀다, 아찔하다, 짙다, 빛나다, 하늘. 뜻 너무 많아.”

어떻게 글자 하나에 뜻이 이렇게 많냐며 신기해하는 차유진의 모습에 김래빈도 말은 하진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저도 검을 현에 이렇게 많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색을 의미하는 뜻으로 쓴 거야.”

차유진이 한 번 더 첫 번째에 있는 뜻을 소리 내어 읽었다.

“검다. 검붉다.”

“네가 콘서트 색감을 빨간색으로 잡고 싶어 하니까, 나는 검은색으로 잡고 대비를 이루면 어떨까 싶어서.”

“나는 빨간색. 김래빈은 검은색.”

“그래.”

김래빈의 설명을 들은 차유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바싹 자른 손톱 끝이 ‘검다’ 옆에 있는 ‘검붉다’란 글씨를 가리켰다.

“검붉다. 이거 검고 붉다는 뜻이야.”

“맞아.”

김래빈이 긍정하자 차유진이 히죽 웃으며 집게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제스처에 어리둥절해진 김래빈이 요구대로 순순히 상체를 차유진 쪽으로 기울이자, 차유진은 둘 말곤 아무도 없는 회의실인데도 비밀을 속삭이듯 귓가에 손을 모은 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김래빈이 내 색으로 물드는 거네.”

“…!”

화들짝 놀라 귀를 감싼 김래빈이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아서였을까. 등줄기를 타고 열이 쭉 오르고 솜털은 쭈뼛 섰다. 남다른 반사신경을 발휘해 김래빈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붙잡은 차유진이 김래빈을 올려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차유진의 뺨이 크게 부풀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김래빈 지금 표정 왜 그래?”

“니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런 거잖아!”

“진짜 웃겨.”

험악하게 금이 간 김래빈의 미간을 보며 차유진은 계속 킬킬댔다.

“그만 웃어. 그리고 내가 말한 뜻은 검다는 의미였어.”

“검붉다는 뜻도 된다고 적혀 있어.”

“아니야. 검다는 의미만 허용할 거야.”

“검붉다란 뜻도 돼.”

“검다라니까.”

“검붉다!”

“검다!”

검을 현이 검은색인지 검붉은색인지에 대한 논쟁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시간에 맞춰 가장 먼저 회의실로 복귀한 직원이 옥신각신하는 막내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투덕거릴 일인가 싶었다. 검을 현의 뜻이 검으면 어떻고 검붉으면 어떠냔 말이다. 붉은색이 검은색을 물들였는지―김래빈은 ‘침범’이라고 표현했다―알 수 없었지만, 피어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김래빈의 귓불은 확실히 붉게 물든 상태였다.

막내들의 말싸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직원이 테이블에 있는 My favorite color R.E.D의 가사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신곡 아이디어인가, 싶어 집중해서 읽어보다가 잘게 떨기 시작한 직원의 동공이 영어와 한자가 조합된 글씨에서 멈췄다.

“레드, 현? 레드현. 오―, 이거 어감이 좋은데요? 신곡 제목이에요?”

“……!!”

막내들의 유닛 콘서트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Written by @Kim_JaHA